한국게임에서 '세계관 팬덤'은 귀한 개념입니다. 싱글플레이 방식이 게임계 주류가 아니고 스토리 위주 게임은 더욱 마니악하기 때문이죠.

프로젝트문은 그 어려운 일을, 심지어 인디게임 규모에서 해낸 게임사입니다. 

2016년 로보토미 코퍼레이션(이하 로보토미)을 얼리액세스로 처음 출시했고, 이제 차기작 라이브러리 오브 루이나(이하 라오루)를 8월 5일 정식출시합니다. 핵심 콘텐츠 추가는 이미 모두 끝냈고 지금은 신작과 함께 또 다른 '떡밥'을 투척하고 있습니다.

라오루가 2020년 얼리액세스로 막 나왔을 때, 좋은 게임이라고 하기는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눈부신 속도로 피드백이 반영되면서 콘텐츠와 게임성이 개선됐고, 이제는 해외에도 당당하게 내밀만한 수작이 됐습니다. 이 도서관은 어떻게 박수를 받으면서 완성될 수 있었을까요.

장르 표기는 도서관 배틀 시뮬레이션인데요. 조금 대중적인 용어로 바꾸면 덱빌딩 장르가 핵심입니다. 청소년 이용불가 등급이며, 사유는 과도한 폭력 표현입니다. 스토리를 지켜보면 당연하다 싶을 정도이니 잔인한 표현에 약한 유저는 주의가 필요합니다.

전작 로보토미 코퍼레이션과 동일한 세계관으로 엮여 있습니다.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윤리가 극단적으로 타락해버린 디스토피아 도시가 배경입니다. 전작을 하지 않았어도 게임 속 과거 설명으로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지만 이야기에 완벽하게 빠져들고 싶다면 전작 플레이가 필요합니다.

유저는 도서관의 시종이 되어 '접대'라는 이름으로 방문객과 싸우고, 죽인 적들을 책으로 만들어 카드풀을 넓혀나갑니다. 스토리를 진행하면서 적은 점차 강해지지만, 그만큼 유저의 책장과 카드 역시 강해집니다. 그 과정에서 펼쳐지는 여러 세력과 인물들의 군상극이 라오루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카드배틀은 독창적입니다. 동시에 재미있습니다. 머리를 쓰는 게임이 이런 2개 과제를 동시에 만족하는 일은 드문데요. 이것만으로 수작이라고 불릴 가치는 충분합니다.

비결은 속도 주사위 시스템에서 나옵니다. 아군과 적군은 막(턴)이 시작할 때마다 각자의 스펙에 맞는 주사위를 굴리고, 큰 숫자가 나온 순서대로 공격 우선권을 얻습니다. 서로의 카드가 맞부딪치면 '합'이 발생하고, 카드에 적힌 공격과 방어 주사위를 굴려서 대미지가 결정되죠. 그렇게 막이 반복되면서 승패를 가리는 방식입니다.

설명만 들으면 어려워 보이는데요. 실제로 쉽진 않습니다. 다른 덱빌딩 게임에 전혀 없던 방식이라 적응 과정이 필요해요. 하지만 익숙해질수록 합을 맞추면서 적절한 카드를 내밀고, 부가적 시스템을 컨트롤하는 재미에 빠지게 됩니다. 턴제 카드배틀에서 드물 정도의 긴장감도 장점이고요.

덱은 책장 속에 카드를 넣어 완성합니다. 좋은 책장을 얻을수록 주사위가 강해지고 책장 옵션에 따라 다양한 콘셉트의 덱을 구성할 수 있죠. 플레이하다 보면 도서관 사서 숫자가 늘고 층별 환상체 책장도 얻으면서 덱빌딩이 자유로워집니다. 

난이도 커브도 적절합니다. 초반은 적당히 좋아 보이는 카드만 넣어도 무난히 넘길 수 있는데, 도시악몽 챕터에 들어설 때쯤이면 최대한 머리를 굴려가며 최적의 덱을 짜야 하죠. 좋은 책장을 얻기 위한 파밍 작업도 여기서 시작하게 됩니다. 간단한 전투에서 시작해 극단적인 싸움까지 도전하는 과정이 부드럽게 이어집니다.

게임 재미만으로 유저를 끌어모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팬덤은 조금 다른 개념이죠. 로보토미부터 시작된 세계관이 더 광대하게 확장되고 그 세계를 관통하는 이야기와 캐릭터들이 활약에 나섰습니다. 그로 인해 많은 유저가 고정팬이 되어 몰입하는 결과를 낳았죠.

텀블벅에서 실시한 라오루 더빙 및 OST 제작 펀딩은 많은 것을 보여준 사례입니다. 총 후원액이 무려 2억 6천만원. 가장 싼 상품이 게임+OST 합본 6만원이었는데도 1,389명이 참여했습니다. 그중 450여명은 30만원 이상 상품을 선택했고요. 충성도가 보통 높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비율입니다.

라오루는 높은 퀄리티로 펀딩에 보답했습니다. 7만 단어가 넘는 분량에서 스토리 대사를 풀보이스 더빙했고, 훌륭한 OST가 게임 속 긴박한 전투 분위기를 극대화했습니다. 그 시점에서 유저 반응은 폭등했죠. 더빙과 음악은 이야기 몰입을 도와주는 핵심 '스타일'입니다. 프로젝트문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 같습니다.

패치를 거듭해도 아쉬운 단점은 있습니다. 불친절과 불편함이죠. 

개인적 경험을 고백하자면, 책장을 바꿔넣을 수 있다는 개념을 모른 채 게임했습니다. 기본 책장만으로 덱을 짜는 자체 하드모드 플레이를 해버린 거죠. 도시질병 챕터부터 난이도가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어 공략을 찾다가 깨닫고, 그 뒤로 '정상적인' 게임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핵심 시스템인데도 잠시 정신을 놓으면 깨닫지 못하고 지나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올해 들어 패치로 튜토리얼이 개선된 점은 다행인데요. 여전히 전투에서 설명이 부족한 부분은 종종 나옵니다. 시스템 대부분이 독특하다 보니 그만큼 배워야 할 점이 많기도 합니다.

원하는 책장을 얻기 위해 반복 파밍을 해야 하는 구조도 부담입니다. 책이 확률적으로 나오게 설정되면서 생기는 현상이죠. 파밍 없어도 볼륨이 방대한데, 굳이 리플레이를 유도할 필요는 없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후반부 스토리를 전투에 지나치게 반영하다가 유저 입장에서 지치게 되는 현상도 있습니다.

덱빌딩 게임을 좋아한다면, 특히 신선한 재미의 덱빌딩을 찾고 있다면 라오루는 놓치지 말아야 할 게임입니다. 오직 게임성만으로 플레이할 가치는 충분합니다. 물론 프로젝트문 특유의 촘촘한 세계관, 스토리, 캐릭터도 중요한 매력이고요.

엔딩까지 적어도 30~40시간, 최대 100시간 이상 걸리는 플레이타임도 특징입니다. 로보토미부터 이어져온 거대한 스케일이죠. 장점이자 단점일 수 있지만, 적어도 이들의 IP를 파고들어볼 가치가 충분하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초반 진입장벽만 넘으면 말이죠.

프로젝트문은 라오루 정식출시와 함께 후속작에 대한 힌트를 조금씩 내비치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도 팬덤의 분석을 자극할 만한 코드를 가득 집어넣으면서 정체성을 보여주는데요. 지금까지의 힌트 중심에 '림버스 컴퍼니'라는 키워드가 있는 것으로 추측됩니다. 

빠른 피드백, 독창성, 스토리텔링, 이후 흥미 유발까지. 라오루는 강력한 팬덤을 형성하는 방법의 정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곧 정식으로 도서관이 개장합니다. 이 작은 게임사의 세계관이 어디까지 팽창할 수 있을지, 아직은 그 끝이 짐작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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